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세계 대전 (문단 편집) === 전쟁 열병/자원병 열풍 === 1차 세계 대전의 특이한 점 중 하나는 역사상 손꼽힐 정도로 크고 끔찍한 전쟁에 자원입대를 하면서 군대로 들어간 젊은이들이 넘쳤다는 것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언론에서는 청년들에게 군대로 입대할 것을 권했고 [[엉클 샘|"Your country needs you", "I want you"]] 등 유명한 문구의 모병 포스터들이 거리에 붙여졌다. 물론 전쟁에 대해서 비판적이며 두려워하는 사람도 많았다.[* 미국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도 전쟁을 결정했으나 정작 본인은 전혀 전쟁에 호의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선전포고 승인을 요청하는 의회 연설 후 의원들의 열화와 같은 갈채를 뒤로 하면서 "방금 연설은 젊은이들에 대한 죽음의 신호였는데, 그렇게 박수갈채를 보내니 참 이상한 일이야..."라고 보좌관에게 푸념할 정도였다고. 실제로 그의 결정으로 1918년 한 해 동안 미군 10만 이상이 전장에서 죽었고, 만일 독일이 백일공세를 실패한 뒤 미군이 들어가지 않았다면 피해는 몇 배나 커졌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을 피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겁쟁이나 [[매국노]] 등으로 몰리기 일쑤였고 심지어 프랑스의 [[장 조레스]]처럼 살해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주변 또래들은 자원해서 군대로 입대하는데 건강한 청년이 입대하지 않고 마을에 남아있기란 쉽지 않았다. 거기다 당시에는 [[낭만주의]]가 만연하던 [[벨 에포크]] 시대였다. 시나 소설에서도 나폴레옹과 같은 전쟁 영웅들의 멋진 서사시를 노래할 뿐 전쟁의 참혹함이나 그 속에서 죽은 병사들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낭만주의의 영향으로 젊은이들에게 전쟁은 참혹하고 잔인한 것이 아닌, 단순히 영웅놀음이나 성인식, 모험 등으로 각인되었다. 또한 전쟁에 대한 지나친 낙관도 있었다. 당시의 유럽인들은 [[보불전쟁]] 이후 40년 동안이나 이어진 [[벨 에포크]] 시대의 길어진 평화로 인해 전쟁에 대해서 다소 낭만적인 생각이나 동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100여 년간 전 유럽대륙을 아우르는 대규모의 전면전도 없었던 데다 전쟁을 치르더라도 대부분 단기간 내에 좀 치고 받으면서 끝나는 수준이었다.[* [[크림 전쟁]] 시기부터 사상자가 이전과는 달리 대규모로 나오기 시작하지만, 유럽의 변방에서 벌어진 전쟁이었고 [[전염병]]이 돌아 죽은 사람도 많았다. 유럽에서 가장 최근에 일어났던 대규모 전면전인 [[보불전쟁]]은 독일과 프랑스만의 전쟁이었으며 독일군의 피해는 동원된 병력에 비하면 상당히 적은 수준이었다.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이런 참혹한 총력전의 징조가 보였지만 유럽의 참전무관들은 이를 미국의 전쟁 수행능력이 떨어져서 벌어진 상황으로 인식하여 남북전쟁의 피의 교훈을 스스로의 피를 흘리며 얻어야 했다.] 그래서 시대는 [[산업혁명]]과 병기의 발달로 인해 과거와 비교도 할 수 없었지만, 전쟁관은 여전히 중세적, 전근대적이었다. 19세기만 하더라도 군대라고 하면 금 장식이 달린 유니폼을 입고 포화와 총격에도 꿋꿋히 전진하는 [[라인배틀]]로 상징되는 명예와 자부심이 느껴지는 것이다. 특히 중세 유럽의 전쟁의 양상과도 1차대전은 너무나도 달랐다. 과거 유럽왕족은 친인척으로 얽힌 경우가 많았고, 전쟁을 스포츠처럼 여기는 경향이 많았다. 그래서 중국의 중원통일처럼 나라 대 나라가 존폐여부를 걸고 싸우는 경향이 아닌 몇번의 큰 전투 이후 판도를 본뒤 조약으로 끝내는 경우가 많았다. 평민들에게도 전쟁은 기사들이 출진하고, 영주가 바뀌더라도 거기서 그칠 뿐, 체감하는 개인적인 일은 없어 크게 상관있지 않은 이야기들이였다. 그러나 20세기가 들어서면서 더이상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니였다. 유럽에서 [[애국심]]과 [[민족주의]] 열풍이 강하게 불던 시기로, 또한 [[보불전쟁]]에서 징집된 병력을 철도로 얼마나 빨리 집결시키는지가 승리의 큰 요소가 됨이 증명되었었기 때문에 국가적으로도 [[모병]]과 애국심 고취에도 많은 힘을 쏟았다. 전쟁에 참여하는 병사들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생각으로 전쟁터에 나아갔다. 냉병기시대와 달리 총이 개발되면서 더이상 숙련된 병사가 필수적이지 않았다. 1명의 숙련된 기관총 사수보다 5명의 초보 기관총 사수가 더 압도적이었다.[* [[솜 전투]] 당시 영국군이 첫날 어떻게 쓸려나갔는가 보면 알 수 있다. 1차대전 영국군 전체 전사, 실종자의 45분의 1인 2만 명이 전투 첫날 나왔다.] 거기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대량생산이 가능했긴 때문에 물자또한 충족시킬수 있었다. 이로 인해 영주 대 영주의 돈(전쟁수행유지용) 대결이 아닌 국가 대 국가의 [[총력전|국가 총동원]]개념이 되었다. 그리고 이 총력전은 전쟁의 승패와 무관하게 참전국 전원을 존폐의 위기에 몰아넣는 다같이 망하는 수준의 피해를 불러왔다. 사실상 오랫동안 유럽 본토에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던 탓에 유럽인들에게 전쟁이란 기껏해야 머나먼 [[식민지]]에서 낙후된 토착민들을 우월한 기술력이 적용된 무기로 [[학살]]하는 경험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기관총]]이 발명되면서 유럽과 비유럽의 군사력은 엄청난 격차가 생겨났다. 1898년 아프리카 수단에서 벌어진 [[옴두르만 전투]]에서 영국군이 기관총 등으로 수단의 독립군을 상대해 수단군 25,000명을 살상했지만 영국군 피해는 500명 사상에 불과했다. 당시 참전했던 젊은 처칠은 "야만인을 상대로 한 현대문명의 가장 위대한 승리"라고 표현했다.] 이렇게 조국의 군대가 타 국가를 손쉽게 혼내줄 것이라는 생각에 흥분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급속도로 발달하던 기계화된 무기들이 자신들을 향해 대량으로 사용되면 얼마나 공포스러운 일이 발생할 것인가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1910년대 초기에 벌어진 몇 차례의 국가들 간의 형식적인 대치만 하는 모습은 이러한 착각을 더욱 부추겼다. 또한, 독일과 프랑스가 식민지 대결을 하면서 이런 일이 자주 벌어졌는데... 그러다 보니 많은 청년들은 '''"그까짓 전쟁... 이번에도 적당히 대치만 하고 총 몇번 쏘다보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나는 영웅이 되겠지?"''' 라는 기대를 품기도 했다. 결국 전쟁 발발 초기에 영국, 프랑스, 독일의 모병소에 국가에 대한 거룩한 의무를 수행하고 살아서 돌아오면 전쟁영웅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흥분한 지원병 청년들이 미어터졌다. 하지만 이 전쟁이 얼마나 참혹할지, 또 얼마나 오랫동안 이어갈지 제대로 예상한 사람은 드물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전쟁이 아무리 길어봐야 3개월 정도면 끝나고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지나친 낙관에 차 있었다.[* 이 때문에 1914년에만 유일하게 [[크리스마스 휴전]]이 일어나고, 전쟁이 길어짐에 따라 적대심이 높아지면서 1915년부터는 연휴고 크리스마스고 상관없이 적군 참호에 포탄을 쏴제끼는 곳도 있었으나 1918년까지도 기나긴 참호전 와중에 비교적 격전이 적었던 곳에서는 1914년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기념일 같은 때에는 암묵적으로 무기를 내린 곳이 있었다고 한다. 높으신 분들 중 상당수도 다른 날 많은데 하필 크리스마스 같은 때에까지 굳이 싸워야 하냐고 거부감을 느낀 경우가 없지 않았기에, 별도의 공세 같은 것이 예정되지 않은, 일반적인 참호 생활이 이어진 곳에선 그날만큼은 1914년처럼 대놓고 만나진 않아도 암묵적으로 상부의 묵인 혹은 거짓 보고 하에 교전 행위를 접기도 했다.] 즉, 낭만주의와 애국심에 빠저든 젊은이들이 '''"강한 우리나라의 군대가 적군을 물리치고, 나는 그곳에서 영웅처럼 싸워서 승리하고 명예롭게 훈장과 포상을 받고 제대한다!!!"''' 라는 매우 비현실적인 상상에 빠져서 저승사자가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는 전쟁터로 자원입대를 한 것이다. '''물론,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자원 입대를 하고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일부는 진짜로 전쟁영웅이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죽음의 공포를 무려 4년도 넘게 버텨낸 뒤에야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돌아온 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완전히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으며, 결국 이들은 끔찍한 후유증 속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전쟁의 끔찍한 기억을 잊지 못했다. 실제로, 서부전선의 경우는 병사들의 평균 생존시간은 겨우 5일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영국군의 경우는 같은 지역 출신자들은 되도록 같은 부대에 몰아넣었는데, 대량으로 사상자가 발생하는 전투들에서 특정 지역의 청년들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일이 빈번했다. 운 좋게 살아남더라도, 주변에 죽은 전우들이 고향 친구들일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이외에도 굶주림이나 추위는 물론이고 물이 고인 진흙탕 [[참호]]에서 [[참호족]]에 걸리기 일쑤였으며, 대량의 포화 등을 겪고 정신적으로 망가지는 [[셸 쇼크]] 증상을 보이는 병사들도 많이 발생했다. 또한 자신들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무기가 자신들에게 돌아오면 어떤 꼴을 당하는지도 직접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생존자들 중 일부는 그대로 군대에 말뚝을 박기도 했는데, 그런 사람들은 [[제2차 세계 대전|'''또 다시''' 세계 대전에 나가야 했다]]. 말뚝 외에도 국민돌격대, 임관, 정계, 재입대, 추축국의 침공에 대항한 저항운동 등으로 2차대전에도 참전한 1차대전 참전 출신자들도 많았다. 한편, 전쟁이 길어지고 불구가 된 전상자들과 비어있는 관이[* 전사자가 얼마 안 되고 바로 귀환이 가능한 현대 [[미군]] 정도를 제외하면 전장에서 죽은 자들은 대부분 아군 적군 할 것 없이 승리한 쪽이 일괄수습해서 현지에 같이 묻는 것이 불문율이다. [[갈리폴리 전투]] 후 전사한 영연방군의 시신도 오스만군이 일괄적으로 수습해서 매장했는데 전후 전사자 가족들이 튀르키예로 찾아온 사례를 다룬 영화도 있다.] 고향으로 돌아오며 후방에서도 전쟁의 실체를 알게 되었고 전쟁을 결정한 정부는 선거 등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그 대가를 치렀다.[* 참호전의 실태를 몰랐다는 말은 독일인들의 내부중상설급 도시전설이다. 전쟁 초기가 아닌 1915년 이후로 넘어가면 그 실태를 후방에서도 모를 수가 없었다. 부상당하고 돌아온 군인들이 가족들에게 다 말했고, 희생자가 급증하면서 결국 사회 전체에 퍼졌고 군법으로 처벌한다고 막을 수 있는 수준을 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전쟁을 계속한 것은 이렇게까지 서로 죽였는데 전쟁 결과가 패배로 나오면 적국에게 받을 대가가 더 참혹할 것이라는 국민들의 두려움과 더불어 민족주의가 엄청나게 강했던 당시 상황 때문에 정부가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당시 참전국 국민들이 전쟁 실태를 몰라서 전쟁을 이어간 게 아니라, 알면서도 이어간 것이다.][* 실제로 독일이 전쟁에서 패한 뒤, [[베르사유 조약]]에서 부과받은 배상금과 제재는 항복해서 국가 해체까지는 안할테니 그냥 평생 거덜난 채로 살라는 수준이었으며, 독일과의 전쟁에서 가족을 수도 없이 잃어야 했던 협상국 국민들의 분노를 말 그대로 100% 반영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전쟁이 끝나는 그 날까지 학업, 질병 등의 이유로 정당하게 면제받을 수 있음에도 자원입대 하는 사람은 여전히 많았다. 당시는 민족주의/애국심이 지금보다 훨씬 강했기 때문에, 사지멀쩡한 건장한 청년이 군복을 입지 않고 거리를 쉽게 돌아다닐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런 사람들은 뒤에서 겁쟁이라고 험담을 당하고, 종종 어째서 군대로 가지 않았냐는 질문을 받기 일쑤였다. 굳이 뭐라 안하는 분위기라 해도 오히려 낭만주의가 지배적일 때는 전쟁분위기를 혐오했지만 정작 전쟁터에 가서 죽어가는 또래 연령대의 청년들을 보면서부터는 오히려 나만 후방에서 편하게 지낸다는 죄책감에 어떻게 될 지 뻔히 알면서도 자진입대하는 청년들이 적지 않았다. 때문에 많은 청년들이 여전히 자원해서 사지로 들어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